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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 고향 헌팅턴비치

나의 고향은 강원도다. 그러나 난 그곳에서 여섯 살에 떠나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서울에서 졸업했다. 올해 강릉에 갔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100세를 넘기신 고모 한 분뿐이었다. 고모는 홀로 외롭게 살고 계셨다.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운 친구, 친지, 누구 하나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그리던 진정한 고향은 어디 있을까? 미국서 온종일 한국 TV를 보며 그리던 고향산천은 어디였을까?  TV 속의 고향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친구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을 인사동 한복판에서 만났다. 점심 먹고, 차 마시고, 헤어졌다. 대학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고향은 꼭 시골이어야만 하나? 강릉은 더는 시골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뛰놀던 친구도 없고 이름도 기억 못 한다.   1980년 9월에 네 살, 한 살짜리 딸 둘과 남편,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몬테벨로에서 헌팅턴비치로 이사를 했다. 처음 살던 그 집 근처에는 오른쪽에 중국인 부부, 왼쪽엔 일본인 부부가 살았었다. 그들은 50세가 조금 넘어 보였다. 그 당시 29세였던 나를 딸처럼 챙겨 주었다. 그러나 직장을 오렌지카운티로 옮기는 바람에 정답게 살던 인연을 2년 만에 접고 이사를 했다.   헌팅턴비치로 이사 온 다음 날 집 앞에 세워둔 차 윈도에 누군가 쪽지를 남겼다. 자동차를 옮기라는 내용이었다. 옆집 아저씨가 쓴 것 같았다. 이사 오자마자 옛 동네가 그리웠다.     헌팅턴비치는 주민의 70%가 백인이고, 백인 우월주의자도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엔 그들의 갑질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그러나 헌팅턴비치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다. 지금 이곳에 사는 한인은 통계상 1500명 정도라고 한다. 베트남계도 많아 아시안 주민 수가 늘면서 차별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내가 사는 게이트 안에도 한인이 다섯 집이나 있다. 서로 바빠서 자주 못 보지만 만나면 반갑게 서로 손을 흔들어 준다.   헌팅턴비치로 이사 온 지 2년 만에 계획에 없던 임신을 했다. 한국에 계신 시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남편이 임종을 보러 간 사이에 임신 사실을 알고 남편 몰래 유산을 고민했었다. 그때 아기를 돌봐줄 만한 사람도 없고 아이를 3명이나 키울 형편도 못 됐다. 그러나 친정 언니가 ‘너는 아들이 없는데 누가 아니 뱃속의 아이가 아들일 수도 있잖아?“ 하며 유산을 말렸다. 몇 개월 후에 태어난 아기는 정말 아들이었다. 그해 우리 동네에 아들이 여섯 명이 태어났다. 유치원에  갔는데 모두 옆집에서 같이 놀던 남자아이들이었다.     나도  아들 친구 엄마랑 친하게 지냈다. 그들 엄마 중 누가 아기를  낳으면 모여서 베비샤워도 해주고 여행도 같이 다녔다. 아이들 야구 원정 경기도 어울려 다니고 보이스카우트 캠핑도 따라다니며 금발의 엄마들과 몰려다녔다. 제레미는 우리 아들과 특별히 친한 친구인데 그의 엄마 데비는 나 대신 학교에서 자동차로 우리 아이를 자기 집에 데려가 점심도 차려주었다. 또 제레미와 그의 동생들과 같이 놀게 하며 돌봐주다 내가 퇴근하면 아들은 걸어서 집에 오곤 했다. 지금도 페이스북 친구로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데비는 아직 옛날 동네에 살고 있다. 마치 고향을 지키는 충직한 소나무마냥.   옆집 베티와 제리는 우리보다 나이가 20살은 많았지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도와주었다. 우리 집 보험이 잘못되어서 걱정하니 전화로 해결도 해주고, 어느 해 여름휴가 때 마이애미 가는 비행기 티켓을 사 놓았는데 허리케인 앤드류로 인해 비행기가 못 뜬다고 연락이 왔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결항은 항공료 환불이 안 된다고 하여 실망하고 있을 때 제리가 설명을 잘해 환불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제리와 베티는 나이가 70세가 넘으니 고향인 플로리다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가는 날 섭섭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세 명의 아이들을 시간 맞춰 등교시키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때마침 뒷집에 살던 피클이란 예명의 몰몬교 신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녀가 6명이나 됐다. 아이들 중 세 명은 우리 아이들과 같은 반이어서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등교를 나눠서 시켰다. 피클은 다른 금발의 엄마들이랑 차원이 다른 여자였다. 첫째 잘난 척을 안 했다. 친절하고 자유스러우면서도 겸손했다. 우린 좋은 친구가 되어서 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그녀는 지금도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던 그 동네에 가면 데비도 있고 피클도 있다.     헌팅턴비치는 이렇게 많은 추억을 나와 내 가족에게 남겼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모래사장에 가서 집도 짓고 성도 쌓았다. 파도가 밀려오면 고향 생각이 나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모든 것 다 잊고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그러나 너무 바빠서 딴생각을 못하고 살았다.         인간의 계절이 봄에서 여름, 또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선 지금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 때가 다시 찾아온 것 같다. 가까이 지내던 많은 사람이 한국으로 역이민을 간다.     그러나 나는 데비와 피클 같은 친구가 있고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가 있는 이곳에서 살련다. 사람이 모두 떠나버린 한국의 강릉이 아니라 많은 추억과 사람이 있는 이곳이 진정한 나의 고향이다. 나는 늘 바다 건너를 바라보던 내 마음을 헌팅턴비치에 앉힌다. 김규련 / 수필가수필 헌팅턴비치 고향 아들 친구 초등학교 친구 대학 친구

2023-09-21

[수필] 친구

“만나서 얘기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용기가 생긴다 이런 친구가 있기에   미국에 늦게나마   이민 결정을 쉽게 했다”   나에겐 절친이 많지는 않아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는 된다. 그들은 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 유난히 후덕한 친구,  불평이나 판단을 전혀 안 하는 친구, 그리고 평생을  장애우와 함께하는 믿음이 좋은 친구 등이다.   며칠 전에 마음이 후덕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 송금을 하려는데 은행에 다닌 우리 딸에게 방법을 물어봐 달라고 했다. 매사에 능통한 친구가 어지간히 피곤한가 보다 싶어 마침 한국에 있는 내 돈을 송금해 주기로 했다. 나이 들어 용돈으로 쓰려고 조금씩 넣었던 국민연금 2년치였다. 요즘 환율이 올라서 내려가기만 기다리고 묶어 두었던 돈이다. 항상 신세만 져온 친구인지라 높은 환율도 문제가 안 되었다.     며칠 후에 우리는 중간에서 만나 보낸 돈을 건네 받았다. 그런데 100불을 더 넣었다고 하였다. 코로나로 만나서 밥도 못 먹은 지도 오래되니 배달시켜 남편과 둘이서 식사라도 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모처럼 친구에게 도움을 주려 했는데 친구의 후덕함에 또 밀리고 말았다.     우리는 여고 동창이다. 대학을 가면서 다른 친구들과는 뿔뿔이 헤어졌는데 이 친구와 나는 학교는 같지 않았지만 같은 지역이라 주말이면 곧잘 만났다. 친구도 나도 모두 자취를 했는데 친구 부모님은 도시에 집을 사서 일하는 사람까지 두면서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나는 점심 저녁 두 개의 도시락을 싸야 하는 의대 다니는 오빠와 여고생 동생과 방을 얻어 자취를 했다.     그러니까 친구 집에 가면 너무 좋았다. 일을 해 주는 언니가 반찬도 잘하고 가지 수도 많아 교자상이 가득했다. 거기다가 친구 고향이 영광이어서 부엌에는 볏짚으로 엮은 영광 굴비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꼬들꼬들한 굴비를 구워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그 뒤론 그렇게 맛있는 굴비를 먹어본 적이 없다. 친구는 동생들이 다섯이나 되었는데 내가 가면 모두가 반가워했다. 친구와 연년생인 남동생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겼는데 항상 친구와 같이 나를 골목 끝까지 배웅해 주며 또 오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친구뿐만 아니라 온 식구가 편안하고 후덕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남동생은 의대 학장까지 지냈다고 들었다.     친구는 70년대 중반에 LA로 이민을 왔다. 떠나기 전에 우리는 동대문 시장에 갔다. 딸 옷을 사면서 우리 두 딸 것도 사주었다. 바나나를 듬뿍 사가지고 같이 우리 집에 들러 애들에게 실컷 먹으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공무원 월급을 받으며 남편이 박사 과정을 밟느라 바나나는 소풍 갈 때나 한 개씩 넣어주는 귀한 과일이었다. 그러면서 “너는 돈도 없으면서 애는 셋이나 나서 키우냐?”고 했다. 악의가 없이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말이기에 나 역시 “그러게”하며 둘이서 웃고 말았다. 친구는 그때 딸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친구의 솔직하고 담백함이 항상 좋았다. 나는 친구와 달리 누구에게나 듣기 좋게 포장해서 말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동생은 나를 이중 성격자라고도 얘기한다고 들었다. 친구의 짤막한 표현에 나의 모든 상황이 다 들어 맞지는 않지만 복잡한 내 마음이 깨끗이 청소가 된 기분이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친구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우리 집에서 만날 때도 알뜰하게 장보기도 해오고 설거지도 거침없이 한다. 그리고 낙천적이다. 친구의 생활 지침은 오늘 하루 잘 살면 된다라고 한다. 내일 일을 앞당겨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매사에 심플하고 만나서 얘기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용기가 생긴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이민 와서 이날까지 약사 생활을 하며 주위의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이런 친구가 있기에 나도 자식들이 있는 미국에 늦게나마 이민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자랄 때 친구의 정의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 시대의 전래 동화였을 것이다. 허구한 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아들을 보고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이 어떤 친구들과 노나 싶어 아버지 친구와 누가 더 참 친구인가 내기를 하자고 했다. 돼지를 잡아 자루에 넣어 아들 어깨에 메어주며 친구를 불러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숨겨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아들 친구는 대문을 닫아버렸다. 아버지 친구 집에 찾아가 아버지도 친구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아버지 친구는 어서 들어오게나 하며 부랴부랴 대문을 열어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나는 친구 사귀는데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친구들 좋은 점을 부모 형제들에게도 널리 알렸다. 다 지난 일이지만 아버지는 오빠의 배우자도 내 친구 중에서 고르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잘 되면 좋아하고 축하해 주고 어려울 때는 진심 어린 충고를 한다.   이런 친구인데 이제는 만나면 피곤하고 힘들다고 한다. 이젠 쉴 때도 되었다고 말하는 나에게 친구는 두 달 쉬어보니 너무 심심했다고 한다. 팬데믹으로 맘대로 누구를 만날 수 없으니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오래 묵은 장맛 같은 우리의 우정을 위해서라도 만남을 가로막는 코로나 팬데믹과 어서 빨리 굿바이 하고 싶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친구 아버지 친구 아들 친구 친구 부모님

20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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